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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작 모음집

빨강이 좋아(赤が好き) - 이노우에 타케히코(井上雄彦)

by 쓰레기 전문 번역가 2024. 2. 7.

 

 

 

 

 

 

 

1988년 데뷔한 '신인' 작가 이노우에 타케히코는 몇가지 단편들과 그작으로 조금씩 자신의 이름을 알-리고 있었다. 1990년 여름, 그에게 기회가 찾아왔다. 바로 '증간호(増刊號)'였다. 여기서 증간호란, 만화잡지에서 정기발행 부수말고 따로 내는 특집편을 말한다. 실리는 작품들은 주로 싹수는 보이는데 아직 뜨지 못한 중고신인들의 단편이었다. 점프 편집부는 당시 눈여겨보고 있던 이노우에에게 증간호에 실을만한 하이틴 청춘물을 그려달라고 요구했다.

사실 이노우에는 예전부터 자신의 장편작으로 줄곧 농구만화를 그리고 싶어했다. 하지만 당시 일본에서 농구란 마이너한 스포츠였고 이노우에에게는 좀처럼 기회가 찾아오질 않았다. 점프 편집부는 괜찮은 작화와 연출력을 가지고 있던 그에게 표지와 권두컬러라는 엄청난 푸시를 해주겠다고 약속했다. 결국 이노우에는 증간호 단편작업을 맡게 되었고, 그리하여 탄생한 것이 바로 이 '빨강이 좋아'다.

 

 

 

 

 

 



이 작품에는 우리가 아는 강백호(하나미치)와 호열(요헤이), 용팔(노조미), 구식(추이치로), 대남(류지), 그리고 소연이(하루코)가 그대로 등장한다. 아쉽게도 소연이는 '농구 좋아하세요?'라는 대사 대신 그저 예쁘고 착한 모범생, 강백호는 열혈 바스켓맨이 아닌 곰방대로 담배를 피우는 순정 양아치로 묘사된다. 항상 그래왔듯, 소연을 짝사랑하던 백호는 열차에서 그녀를 구해준 계기로 라이벌의 등장과 대립, 오해, 갈등, 마침내 위기등을 넘기고 맺어지게 된다는 지극히도 평범한 스토리다. 작품의 완성도 역시 신인들의 단편 딱 그이상 이하도 아닌 수준이다.

하지만 1990년 8월 증간호에 실려 발간된 '빨강이 좋아'는 독자들에게 좋은 호응을 이끌어냈다. 점프 편집부는 바로 이노우에에게 장편 데뷔를 권하였고, 이에 작가는 긴 상의 끝에 '십대들의 우정과 사랑을 담은 하이틴 청춘 농구만화'를 그리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 그렇게 탄생한 것이 바로 우리 모두가 잘 알고 있는 슬램덩크다. 

 


'빨강이 좋아'가 공개된 시기가 1990년 8월, 슬램덩크 1화의 연재일이 1990년 10월 1일(주간 소년점프 1990년 42호)이었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편집부와의 교섭, 스토리라인, 작화작업까지 단 2달만에 이뤄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시간이 많이 촉박했던 탓인지 작가는 '빨강이 좋아'와 기존에 그렸던 단편 속 캐릭터들을 재활용하기로 했고, 강백호와 소연, 백호군단(桜木軍団)들은 별다른 수정없이 고스란히 슬램덩크에 출연하게 됐다. 이미 눈치챈 사람도 있겠지만,슬램덩크 1화의 초반전개와 '빨강이 좋아'는 농구가 빠진거 빼면 거의 똑같다고 해도 될 정도로 흡사하다.


'빨강이 좋아'는 슬램덩크의 신화를 정립하는데 큰 역할을 한 기념비적 작품이었지만, 어째서인지 그 뒤로 단 한번도 단행본이나 단편집에 실려 출판되지 않았다. 작가가 자신의 데뷔전 단편들을 전부 한번씩은 종이책으로 출판했던 것과 상당히 비교되는 행보다. 이에 관해서는 '빨강이 좋아'가 왜 세월 속에 묻혀버렸는지에 대해서는 꽤 여러가지 추측들이 난무한다. 


1. 산왕전 엔딩 이후 작가와 사이가 틀어진 점프 편집부가 꼬장을 부려서
2. 작가가 스스로 흑역사라고 여겨서
3. 그냥 세월이 흐르다보니 판권이 꼬여서

개인적으로 1번은 말이 안된다고 보고, 아마 2번과 3번의 사이가 아닐까 예상해본다.

물론, 진실은 점프 편집부와 작가만이 알고 있을테고, 우리는 그저 추측만 해볼 뿐이다. 




 

 

 



이 작품이 실렸던 유일한 책인 주간소년점프 1990년 여름 증간호는 슬램덩크 팬들 사이에서 일종의 '환상의 에피소드' 취급을 받으며 현재까지도 상당히 높은 프리미엄이 붙은 채 거래되고 있다. 일본 쪽 팬덤에서는 이 작품이 사실상 슬램덩크 0화로 대접받고 있는 상황이다.

 

하지만 슬램덩크의 모태가 되었다는 점을 빼면 이게 과연 같은 작가의 작품이 맞나 싶을 정도로 평범한 내용이라서, 많은 독자들이 큰 기대감을 안고 펼쳐 들었다가 크게 실망했다고 전해진다. 이 작품을 번역한 본인도 그러하였고, 이 작품을 보기 위해 여기 들어온 사람들 역시 대부분 같은 생각일 것이다.






 

 

 


하지만 그 옛날, 우리들을 설레이게 했던 소연이와 백호의 풋풋한 모습을 다시 만날 수 있다는 점 하나만으로도 이 작품을 볼 가치는 충분하다.

 

 

 

 

 

 

 

 

 




이 작품 속 소연이의 성은 채 씨가 아니라 최 씨로 설정했다. 그 이유는 바로 원문의 성이 다르기 때문이다. 이때는 채치수라는 캐릭터가 탄생하기 전이라서 소연이의 성이 아카기(赤木)가 아닌 오오사키(大咲)로 등장한다. 따라서 한국식 성 또한 최 씨로 변경하였다.

참고로 소연이가 전학오기 전에 다녔다는 신라 고등학교는 원문에서는 토미가오카(富ヶ丘), 즉 슬램덩크에서 서태웅이 다녔던 신라중(富ヶ丘中)과 같은 이름이다.




 

 

 

 

 



악역 사휘현의 일본 이름은 키쿠가와 센키치(菊川仙吉)다. 뭔가 샤방해진 정대만스런 외형에 비해 자신이 점 찍은 여자는 강제로라도 취하려 드는 개막장 나르시스트다. 참고로 센키치의 한자는 신선 선(仙)길할 길(吉)을 쓴다. 하는 짓과 이름이 매치가 되지 않는, 참으로 아이러니한 이름이 아닐 수 없다.


이번 번역에서 제일 힘들었던 점은 바로 센키치의 한국식 이름 짓기였다. 사휘현로 정한 이유는 작중 그의 별명이 살무사라는 점에서 착안했다.

처음에는 '마도광'처럼 악당스멜이 풍기는 이름으로 지려고 했으나 너무 뻔해 보여서 캔슬.

두번째는 센키치(仙吉)의 한자음을 그대로 읽어서 선길로 지으려고 해봤으나 이번엔 너무 착해보여서 캔슬. 

그 뒤로 챗 GPT한테 작명도 시켜보고, 내가 아는 사람들의 이름을 죄다 찾아보고, 슬램덩크 번역가의 작명법도 참고 해본 끝에 '사휘현'으로 정했다.

사씨는 한국에서 희귀성씨이고 '사'라는 단어는 뒤에 어떤 단어를 붙이던 간에 어감이 강해지는 문제가 있어서 이름 짓기가 꽤 어렵다. 그래도 뭔가 한눈에 봐도 악당스럽고 유니크한 네이밍 센스를 추구하는 편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중간자를 휘로 정한 건 개인적으로 휘라는 단어가 멋지다고 생각해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슬램덩크 등장인물들중에서 이름에 휘자가 들어가는 캐릭터가 없다는 점도 한 몫했다.

 

 



기타 작업내용

캐릭터들의 말투는 학산사 정발판을 기준으로 삼았다. 다소 '틀내'가 나지만 많은 이들에게 익숙한 문체다. 개인적으로 비속어 대사에는 육두문자를 남발하는 걸 즐겼으나 이 작품에서만큼은 지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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