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작 모음집

긴 땅굴(ながい窖) - 데즈카 오사무(手塚治虫)

쓰레기 전문 번역가 2022. 5. 5. 18:07

 

 

 

 

 

 

 

 

 

 

'나는 널리 호소하고 싶다.'

'재일조선인들의 민족교육을 일본인의 손으로 지키자.'

"조선인들은 스스로 원해서 일본에 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군국주의에 의해 희생되고 역사를 빼앗기고 짓밟혀 강제노동에 동원당해 이 곳으로 오게 된 것입니다. 정말 궁핍한 생활에 허덕이며 편견과 경멸 속에서 몇 십 년을 살아 온 것입니다. 저는 일본인으로서 이 점에 대해 정말 부끄럽고 면목이 없습니다. 조선인이 어째서 자국역사와 문화를, 조선인교사에게 조선어로 배우지 못하는 것일까요. 

거꾸로 생각해보지요. 우리는 조선인에게 자행한 과거 일본군국주의의 탄압정책을 얼마나 알고 있을까요?  

 

오히려 우리는 똑같은 일을 두 번 다시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제대로 된 반성을 하고 있기는 한 것 일까요?

1966년 4월 16일, <조선신보>

 

 

 

 


<긴 땅굴>은 <선데이 마이니치(サンデー毎日)> 1970년 11월 6일자 증간호 '극화와 만화 제4집'에 연재되었다.

잘 알다시피 데즈카 오사무는 일본 내에서 '만화의 신(神)'으로 추앙 받으며 일본만화를 세계적 수준까지 끌어올렸다고 평가 받는다. 그가 어째서 일본사회가 수십년간 쉬쉬 해온 자이니치(在日) 문제를 작품의 주제로 다뤘는지는 알려져있지 않다. 다만, 작가는 본디 자신의 창작신념에 대해 '모든 가치관에 대한 불신'을 들었다. 과거 어려서부터 힘 없고 또래들에게 괴롭힘을 당하고 살던 연약한 아이였다. 여러가지 신체적 콤플렉스와 멸시 속에서 철저한 '아웃사이더'로 청소년기를 보낸 데즈카 오사무는 그 시절의 경험을 토대로 평생토록 약자(弱者)에 대한 연민을 품었다. 

 

그는 자신의 작품 속에 여러 유형의 사회적 약자들을 그려내며 펜과 종이를 통해 그런 차별을 극복해내기 위해 노력했다. 또한 그가 살았던 오사카(大阪)는 당대 일본에서 재일교포들이 가장 많이 살던 도시였다. 이러한 점들로 미뤄보아, 작가는 예전부터 재일교포들의 차별받는 삶에 대해 깊이 공감하고 귀를 기울였다.


작가는 일본에서 잘 쓰이지 않는 한자 窖(움막 교)를 써 작품의 의미를 강조하려 한 것으로 짐작된다. 본래 일본어로 '아나구라'라고 읽는 窖 뒤에, '구멍'이란 뜻의 아나あな라는 표기를 일부러 덧붙인 걸 보면 그 심증은 굳어진다. 네이버국어사전에 따르면 窖는 땅광(뜰이나 집채 아래에 땅을 파서 만든 광)이란 뜻을 품고 있다. 작가는 아마 제목을 통해 움막 같이 어둡고 긴 땅굴을 표현하고자 했을 것이다.

다만 순수히 만화로서의 완성도로 따지자면 그의 단편들중에서 그다지 좋은 편은 아니다.  하지만 과거사를 반성하지 않고 우경화로 치닫는 오늘날의 일본을 생각해본다면, 이는 역사적으로 매우 기념비적인 작품임이 틀림없다.

이 만화는 이후 데즈카 오사무의 단편 모음집중 하나인 <공기의 바닥(하) 空気の底(下)> 초판본에 실렸으나 몇 년뒤 나온 개정판에서는 모종의 이유로 '삭제'됐다. 그리고 50년이 지난 21세기 현재까지도 데즈카 오사무의 단편들중 거의 유일하게 대중들에게 공개되지 않은 봉인작이 되어버렸다.


데즈카 오사무는 <긴 땅굴>의 봉인 이유에 대해서는 그 어떤 해명이나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당시 사회적 문제였던 재일교포에 대해서 다뤘기 때문에 우익세력과 정치권의 압박을 받았던 것일 수도 있다. 아니면 순전히 낮은 완성도 탓에 제외 되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추측일 뿐, 진실은 하늘의 별이 된 작가만이 알고 있을 뿐이다.

 

 

 

 


* 참고로 작중 등장인물인 제영진의 제(除)씨는 한국에 없는 성씨다. 아무래도 작가가 서(徐)를 착각한 것으로 보인다.